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배우 중 하나로 반드시 거론되는 폴 뉴먼.
오드리 헵번과 함께 1960년대 초중반 과도기를 사용하는 배우이며, 동시에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의 주역 중 하나이기도 했어요. 30대부터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기 시작해 노년이 다 되어서도 정상급의 위치에 올라 있었던 영화계 최후의 클래식 시대 스타예요. 그는 1925년 1월 26일 미국 오하이오주 셰이커 하이츠에서 태어났으며, 예일대 연극대학원 스쿨오브드라마를 통해 연기자 수업을 쌓고 액터스스튜디오에서 리 스트라스버그에게 메서드 연기를 배운 뒤 1955년 예수의 성배 이야기인 <은술잔>으로 영화계에 데뷔했어요. 하지만 이 데뷔작은 대실패였고, 얼마나 영화가 엉망이었는지는 나중에 그가 대배우로 성공한 뒤에 TV방영 계획이 잡히자 "제발 시청하지 말아 달라"는 신문 전면 광고를 냈다고 해요. 하지만 이게 오히려 역효과를 내서 예상외로 높은 시청률이 나왔다고 해요. 그리고 뉴먼이 시대극 영화에 출연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이때 얼마나 심하게 데었는지, 이후 벤허를 제작할 당시 폴 뉴먼에게도 출연제의가 들어왔지만 거절한 이유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해요.
말론 브란도, 제임스 딘과 함께 50년대 미국의 청년문화를 상징하는 배우였던 폴 뉴먼은 대부에서 말론 브란도가 보여준 강한 야성성이나 모성애를 자극하는 제임스 딘의 위태로운 반항아 이미지와는 다르게 도시인의 풍모가 강한 냉소적이고 이지적인 반항아 이미지를 구축했어요. 폴 뉴먼의 꿰뚫어 보는 듯한 파란 두 눈과 명성을 떨친 잘생긴 얼굴은 50년이 넘도록 그를 스크린의 아이콘으로 만들어주었어요. 그러나 주로 터프하고 문제가 많아서 주인공답지 않은 주인공 혹은 범죄자를 연기하며 항상 외모가 중요하지 않은 역할만 찾았던 것처럼 보여요. 또 출중한 연기력에 비해서 상복이 없는 편이었구요.
1958년 <길고 긴 여름날>로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거머쥐고 ,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공동 주연의 테네시 윌리엄스 원작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로 할리우드 톱스타로 자리 잡고, 처음으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어요.
할리우드에서 보기 드문 상식인으로 무명시절 결혼했다가 이혼한 적이 있으나, 1958년 두 번째 부인인 배우 조앤 우드워드와 결혼했으며 그들은 10편의 영화에 함께 출연했고, 뉴먼은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던 <레이철, 레이철>을 비롯해서 4편의 영화에서 아내의 연기를 연출했어요. 그는 조앤 우드워드와 결혼한 이래 사망할 때까지 50년 동안 한 번의 스캔들 없이 금슬 좋은 부부관계를 유지했어요. 다만 조앤 우드워드와의 시작은 불륜이었다고 해요. 폴 뉴먼은 두 부부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질 때 이 부정한 시작점이 숨겨져선 안 된다고 말했을 정도로 자신이 잘못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해요.
그는 <허슬러>에서 파이퍼 로리, 조지 스코트, 재키 글리슨에 맞서 갈등을 겪는 당구 도박꾼 '패스트' 에디 펠슨을 연기하면서 주요 스타로 등극했죠. 1961년 작 <허슬러>로 수상했어야 되었어야 한다는 평가가 많았어요.
1960년대와 1970년대까지 뉴먼이 연기한 주요 역할들은 <허드>에서 연기한 도덕관념이 없는 주인공, <폭력 탈옥에서 연기한 재소자의 리더를 비롯해서 아웃사이더나 일반적인 관행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그는 이 2편의 영화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어요.
가장 사랑받은 그의 영화 2편은 배우 로버드 레드포드와 조지 로이 힐 감독과 함께 했던 작품들이었어요. <내일을 향해 쏴라>는 역대 가장 성공한 서부영화로 꼽히고, <스팅>은 아카데미상 작품상을 수상했어요.
뉴먼은 <슬랩 샷>, <폴 뉴먼의 선택>, <심판>에서 더욱 성숙한 역할을 연기했고, 1987년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컬러 오브 머니>에서 '패스트' 에디 펠슨 역을 다시 연기했어요. 2번째 패스트 에디 역으로 뉴먼은 처음으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했지만, 그것이 그가 가장 잘 연기한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 후로 20년 동안 뉴먼은 드문드문 영화에 출연했으며, <허드서커 대리인>과 <로드 투 퍼디션>과 같이 주로 강렬한 조연으로 출연했어요.
그는 할리우드 식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혐오해서 유명해진 뒤에는 아예 할리우드와 멀리 떨어진 코네티컷으로 이사해서 평생을 살았으며 비영리 식품회사 Newman'own을 설립해 뉴먼 사망 이후에도 모든 수익을 아동 복지나 빈민 구제 등의 사회사업에 쓰고 있어요. 이 회사는 창립 이후 현재까지 2억 달러 이상을 기부했다고 해요. 폴 뉴먼은 "우리는 지금도 충분히 사치스럽게 살고 있기에 우리처럼 부유층에 대한 감세는 범죄와 다름없다. 나는 운이 무척 좋았기 때문에 행운을 타고난 사람들은 그들보다 불운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해요.
정치적으로는 완고한 진보 성향으로 헨리 폰다와 함께 고전 영화계를 대표하는 진보주의자예요. 많은 위대한 영화인들이 무대 위의 이미지와 사생활에서 보여준 인간적인 면모의 갭이 컸다는 점을 생각하면 영화 역사에서 보기 드문 진정한 나이스 가이였으며, 그가 2008년 83세를 일기로 폐암으로 사망하자 그가 살던 웨스트포트 마을의 주민들은 배우가 아닌 '훌륭한 동네 이웃'으로서 그의 죽음을 슬퍼했으며, 마을의 주요 건물이 모두 그를 추모하는 조기를 게양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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