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영화연구소 선정 가장 위대한 여성 배우 3위에 선정된 인물인 오드리헵번.
에미상, 그래미 어워드, 아카데미상, 토니상을 모두 수상한 미국 대중문화계의 그랜드슬램 수상자이기도 하며 할리우드를 넘어서 클래식 시대의 막바지인 1950~60년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기도 해요.
그녀는 영국의 은행가인 아버지 조지프 앤서니 러스턴과 네덜란드의 귀족인 엘라 판헤임스트라 여남작 사이에서 1929년 5월 4일 태어났는데요. 벨기에에서 태어나 네덜란드에서 자라고 영국에서 교육받은 오드리 헵번은 1950년대와 1960년대 할리우드에서 우아하고 세련된 유럽 배우를 대표하게 되었고, 그녀의 타고난 여성스러움과 세계적인 패션 감각은 지금까지도 팬들에게 반향을 일으키고 있어요. 뉴욕타임스 비평가 보슬리 크라우더가 쓴 것처럼. 그녀는 '장엄함과 순진함이 번갈아 나타나는 가냘프고, 작고 여린, 아련한 미인'이었어요.
어린 시절, 헵번은 2차 대전 동안 독일에 점령당한 네델란드에서 어려움을 겪었어요. 헵번은 안네 프랑크와의 관계에 관해 말하기도 했는데, 동갑이었던 두 사람은 모두 나치의 점령 아래 네덜란드에서 살았어요. 전쟁이 끝난 후 헵번은 런던에서 발레를 배우다가 배우로 전향했어요. 그녀는 몇 편의 영국 영화에 출연했고, 1951년 브로드웨이로 이주해서 프랑스 작가 콜레트의 원작을 무대화한 뮤지컬 <지지>에 출연하게 되었고, 이듬해 할리우드에 입성했어요. 24세 때인 1953년에 그녀의 미국 영화 데뷔작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영화 <로마의 휴일>의 여주인공인 앤 공주 역에 오디션을 거친 후 발탁되었고, 하룻밤 사이에 그녀를 스타로 만들어 주었죠. 그레고리 펙의 상대역으로 출연한 그녀는 미국 기자와 사랑에 빠지는, 평민으로 변장한 공주를 연기했어요. 본래 <로마의 휴일>은 프랭크 카프라 감독이 캐리 그랜트와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주연으로 만들 예정이었으나 조지 스티븐슨에게 프로젝트가 넘어가게 되었고, 스티븐슨도 거절해서 윌리엄 와일러가 감독하게 되었어요. 또 와일러는 앤 공주 역을 진 시몬즈에게 맡기고 싶었지만, 스케줄이 안 맞아서 캐스팅이 불발되고 예산도 축소되어 연극배우로서 어느 정도 인지도는 있었지만 영화계에서는 무명이었던 오드리 헵번을 최종적으로 캐스팅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어요. 그녀는 개봉 즉시 미국 관객들을 사로잡았고,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어요.
1954년 아카데미상 <로마의 휴일>과 토니상 <온딘>을 수상했어요. 그녀는 같은 해에 두 상을 모두 수상한 3명의 여배우 중에 한명이에요. 다른 두 여배우로는 셜리 부스와 엘렌 버스틴이 있어요.
이후, 헵번은 빌리 와일더 감독의 1954년작인 <사브리나>에서 여주인공 사브리나 페어차일드역을 훌륭하게 소화하며 제 27화 아카데미상 여우주연 후보에 오르는 등 인지도를 점점 높여갔어요. 이 영화에서 헵번이 입었던 옷과 스타일은 사브리나 팬츠, 사브리나 플랫이라 불리며 유명해요. 참고로 영화배우에게 특정 브랜드가 최초로 의상 협찬을 시작한 영화가 바로 <사브리나>인데요. 이때 협찬한 브랜드가 바로 지방시(Givenchy)였어요, 지방시는 이때 얻은 광고효과로 인해 매출이 급격하게 늘어 큰 이득을 보았고, 이후부터 오드리 헵번이 출연하는 영화에 적극적으로 의상협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해요.
헵번의 대표적으로 꼽히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입었던 블랙 드레스도 지방시의 브랜드라고 하네요. 하지만 헵번은 협찬받은 옷은 모조리 촬영이 끝나면 반납했다고 해요. 이게 영화, 드라마 협찬의 시초이자 시작인거죠.
화려했던 50년대가 지난 후, 1961년 블레이크 에드워즈 감독의 작품인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주인공을 맡아 다시 한번 시대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는데요. 가장 사랑받는 그녀의 역할은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맨해튼 사교계 명사가 되는 평범한 소녀 홀리 골라이틀리역으로 이른 아침에 검은색 선글라스와 드레스를 입은 여주인공이 택시에 내려 뉴욕 5번가에 위치한 티파니 보석상의 쇼윈도 앞에서 커피를 들고 크루아상을 먹는 모습은 명장면으로 스크린의 불멸성을 부여하였어요. 작품상을 비롯해 8개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마이페어 레이디>에서 연기한 엘리자 두리틀역도 그녀가 맡은 역할에서 사랑받는 역할이죠. 그 당시 헵번을 <마이 페어 레이디>에 캐스팅한 데 대한 논란이 일었는데 브로드웨이에서 엘리자 두리틀로 성공적인 연기를 보였지만 영화계에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그녀가 줄리 앤드루스를 누르고 캐스팅되었기 때문이었어요. 영화 속 노래에 헵번 대신 마니 닉슨의 목소리가 더빙되었고 따라서 헵번은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지 못했어요. 아이러니하게도 그해 앤드루스가 > 메리포핀스>에 출연해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죠.
영화배우로 활동하는 내내 오드리 헵번은 대부분 할리우드의 슈퍼스타급인 나이 든 남자들과 함께 출연했어요. 그중에는 험프리 보가트와 윌리엄 홀든 <사브리나>, 프레드 아스테어 <퍼니 페이스>, 모리스 슈발리에와 게리 쿠퍼 <하오의 연정>, 캐리 그란트 <샤레이드> 그리고 렉스 해리스 <마이 페어 레이디>가 있어요.
헵번은 유럽과 미국의 패션 아이콘으로 남아있어요. 그녀가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입었던 검은색 민소매 드레스는 2006년 92만 달러에 경매되었고, 이 수익금은 인도에 사는 빈민 아동들을 위해 쓰였어요.
헵번은 1976년 연기를 그만두고 스위스에 살면서 자선활동에 전념했어요. 1988년부터 유니세프 대사로서 인권운동과 자선사업 활동에 참가하고 제3세계 오지 마을에 가서 아이들을 도와주었으며, 그런 활동에서 미소 짓는 녀년의 헵번이 보여준 모습은 젊을 적 미녀의 이미지 못지않게 유명해졌으며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어요. 특히 1992년 암 투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소말리아에 방문하여 봉사활동을 한 것이 유명해요. 이러한 행보를 기리고자 이후 유니세프에서 이름을 딴 오드리 헵번 인도주의상을 케이티 페리에게 수여하기도 했어요, 또한 유니세프에서 주최한 대니 케이 국제 어린이 경연 대회가 열리게 된 결정적 계기도 대니 케이가 아닌 오드리 헵번이었죠. 1992년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의 수훈자가 되었고, 1993년 1월 20일 향년 63세 대장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그녀는 유니세프 굿윌대사로 세계를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삶을 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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