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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학을 추구한 완벽주의자 현대 최고 영화 감독 스탠리 큐브릭

by 츠키아카리 2023. 1. 25.

1928년 7월 26일 뉴욕의 자치구 맨해튼에서 의사 제이컵 레너드 큐브릭과 그의 아내 세이디 거트루드 큐브릭 사이에서 태어났어요. 스탠리의 부모는 공통적으로 그들의 부모 혹은 조부모 중에서 오스트리아 출신의 인물을 두었으며, 스탠리의 두 번째 아내 루스 소봇카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미국인이었어요. 혈통상으론 유대인 가족이었죠. 그의 부모가 유대교로부터 개종한 것의 영향과 스스로를 무종교로 여기게 한 그의 발언 등을 고려해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거의 지니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시각이 있으나, 그의 후기 예술이 유대인 혈통으로서의 특징을 가진다는 의견들 중에서 제프리 콕스가 서술한 문 앞의 늑대는 스탠리 큐브릭을 일관되게 유대인 특유의 포스트홀로코스트 예술가로 묘사하고 있어요.

유대인 단체의 자금 기부 요청을 거부한 일이 있었으며, 할리우드를 움켜쥔 유대인들 횡포가 심하다는 발언으로 인해 반유대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어요. 이에 동료 유대인 영화감독인 스티븐 스필버그는 그 비난에 반론하여 큐브릭을 옹호했죠.

뉴욕자치구 브롱크스에서 자랐으며, 10대 때 사진작가와 재즈 음악가를 꿈꾸었어요. 19040년 거주 공간의 변화가 스탠리의 낮은 학업 성적을 개선하는 데 영향을 줄 것을 기대한 아버지 제이콥은 스탠리를 캘리포니아의 도시 패서디나에서 그의 삼촌 마틴 퍼 벌러 와 살게 했어요. 브롱스로 돌아온 이후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다닌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고등학교에서의 성적은 좋지 않았으며,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참전 군인들의 대거 복귀가 더해져 대학교 입학을 포기했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었던 첫 번째 부인 토바 메츠와 1948년 5월 28일에 결혼했으며, 1953년 <공포와 욕망>을 연출, 제작, 촬영, 편집했으나 흥행에 실패했어요. 영화를 작업한 인원은 총 14명이었으며 LOOK에서 큐브릭의 조수로 일했던 밥 디렉이 제작 매니저를 맡았고, 아내 토바 메츠는 대사 감독과 제작 보조의 역할을 맡았으나, 당시에 겪은 마찰로 인해 1951년 메츠와 이혼했어요. 큐브릭은 이듬해 1952년에 만난 미술감독 루스 소봇카와 교제했으며, 그녀와 1955년에 결혼했어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거의 50년 동안 활동했지만, 13편의 영화밖에 제작하지 않았어요. 완벽주의, 극단적인 신중함 그리고 흔치 않게 여러 테이크를 찍는 것으로 유명했던 그였기에 더욱 많은 작품을 감독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13편의 영화 가운데 몇몇은 고전으로 꼽히며, 그중 블랙코미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와 획기적인 공상과학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상당히 영향력 있는 작품으로 꼽혀요. 

 

큐브릭은 사진사로 사회에 진출한 후 1951년에 영화감독으로 전향했어요. 2년 후 그는 장편영화 <공포와 욕망>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반전 고전영화인 그의 4번째 영화 <영광의 길>은 10대에 아버지의 서재에서 접한 험프리 콥의 소설 영광의 길을 영화화할 것을 제임스 해리스에게 제안했으며, 승낙을 받았어요. 소설의 각색을 위해 전작에서 작업을 함께한 짐 톰슨과 콜더 윌리햄을 영입해 시나리오를 작성했어요. MGM은 제출된 프로젝트를 거절했으나, 시나리오를 마음에 들어 한 배우 커크 더글러스가 영화에 출연하는 데 동의하고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로부터 지원 획득에 이바지했어요. 영화 <영광의 길>은 큐브릭에 의해 연출되었으며 1957년 12월 20일에 개봉했어요. <영광의 길>을 제작했을 때 이미 엘리트 감독으로 자리매기함 상태였어요.

1차 대전 기간 중 결실 없이 끝나버린 프랑스전의 계획을 냉소적으로 엮은 <영광의 길>은 큐브릭이 30년 동안 완성한 반전 3부작 중 첫 작품이었어요. 이 3부작은 냉전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닥터 스트레인지>로 이어지며 베트남전으로 눈을 돌린 <풀 메탈 자켓>으로 끝을 냈어요. 핵전쟁을 다룬 <닥터 스트레인지>는 상업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정치 풍자극이었는데, 큐브릭은 이 블랙코미디를 통해 미국 정부가 핵을 저지하려고 취한 방법의 불합리함을 보여주고 있어요. 이 영화는 주인공인 정신이상 과학자를 포함해 각기 다른 세 역할을 연기한 코미디 배우 피터 셀러스의 인상적인 연기로도 유명해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처음에는 큰 성공을 이루지 못했지만, 공상과학 장르가 점점 더 정교해지고 주류가 되면서 그 의미도 점점 커졌어요. 이 영화는 고전적이고 단순하게 공상과학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신 시각적 형상화와 음악적 환기를 사용한 완벽한 사례로 꼽혀요. 혁신적인 특수 효과를 통해 큐브릭은 관객들에게 우주의 광활함을 화려하게 보여줘요.

 

다른 주요 영화로는 역사적인 서사글 <스파르타쿠스>는 제작과 주연을 맡은 커크 더글러스의 압력으로 예정되어 있던 감독 앤서니 맨을 제치고 큐브릭이 <스파르타쿠스>에 기용되었어요. 큐브릭은 연출과정에서 많은 제약을 받았고, 각본을 수정할 권한과 최종 편집권을 갖지 못했으며, 본인에게 이러한 압력을 가한 주체들 중 하나인 더글러스와 큰 갈등을 겪고 관계를 끊게 돼요. 비록 큰 흥행을 거두었으나 큐브릭은 1960년에 개봉한 이 영화를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삭제되길 바랄 정도로 싫어했어요. 큐브릭은 자유로운 환경을 추구하여 할리우드를 떠나 영국으로 이동했으며 이후 미국의 자본과 영국의 기술력이 혼합된 영화들을 연출했으며 반드시 제작을 겸했어요.

 

큐브릭과 제임스 해리스는 출간되기 전에 읽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롤리타를 영화화를 계획하여 판권을 구입했어요. 그들은 나보코프의 대리인 어빙 스위프티 라자르를 만나, 나보코프가 시나리오를 작성할 수 있는지를 논의했으나, 나보코프가 거절했어요. 이에 큐브릭은 <영광의 길>의 시나리오를 함께 작성한 콜더 윌링햄에게 롤리타의 시나리오 작성을 요청했어요. 윌링햄은 시나리오 초안을 집필했지만, 큐브릭이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큐브릭과 해리스는 롤리타의 영화화에 대한 워너 브라더스와의 협상을 포기하고 영국의 세븐 아차스와 계약을 했으며, 영국 배우와 스태프를 공용하는 조건으로 세금 혜택을 얻었어요. 큐브릭은 나보코프에게 시나리오를 작성해 줄 것을 다시 요청했으며, 나보코프의 수락을 받았어요. 나보코프는 1960년 여름에 400페이지 분량의 시나리오를 작성했는데, 일부 장면은 기존의 소설이 갖고 있는 않은 내용이었어요. 그러나 시나리오의 상당한 부분이 검열에서 지적되었기 때문에 큐브릭이 시나리오의 많은 요소를 삭제하고 변경했어요. 큐브릭에 의해 연출된 영화 <로리타>는 1962년에 개봉되었으며  MGM에 의해 배급된 최종 필름본은 미국영화협회로부터 성인 등급인 A를 받았고, 영국검열위원회로부터는 X등급을 받았어요.

1971년, 사회비판과 염세주의가 극에 달한 앤서니 버지스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를 연출하여 큰 논란을 일으켰는데요. 논란이 일었던 초현대적인 작품 <시계태엽 오렌지>는 원래 X등급을 받았으나, 재편집을 통해서 1972년 재개봉되었어요. 이 작품은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른 X등급 영화 2편 중 하나에요., 컬트호러의 고전인 <샤이닝>, 그리고 그의 마지막 작품 <아이즈 와이드 셧>이 있어요. <아이즈 와이드 셧> 또한 X등급에 해당하는 오늘날의 NC-17등급을 받을 뻔했지만 디지털로 난잡한 장면을 바꾸고 난 후 R등급을 받을 수 있었어요.

 

스탠리 큐브릭은 영화 역사상 가장 환상적이고 독창적인 영상을 만들어낸 감독으로 여겨지고 있는데요. 배리 린든에서는 나폴레옹 프로젝트에서 계획한 기계적인 조명 요소를 최대한 배제한 사실적인 자연광 촬영에 대한 바람을 유지하여 촛불을 조명으로 활용한 기법을 도입했으며, 샤이닝에서는 스테디캡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고 해요.

그는 사운드트랙을 정말 잘 활용하는 감독중에 한 명으로 뽑히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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