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cm의 큰 키와 금발벽안, 뚜렷한 이목구비로 1940년대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며, 그녀는 영화 속에서 화장을 거의 하지 않았던 영화배우로 진정한 미인으로 꼽혔다고 해요. 아카데미상 7회 노미네이트 및 3회 수상, 에미상 2회 수상, 토니상 1회 수상으로 영화, TV, 뮤지컬 부문의 3관왕을 달성할 정도로 연기력도 뛰어났던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
1915년 8월 29일 스톡홀름에서 스웨덴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어요. 그러나 3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13살 때는 아버지를 여의어 숙부의 집에서 자랐으며 17세 때 스웨덴 최고의 명문인 왕립 드라마 스쿨에 입학했으나 자퇴하고 영화계로 투신해 스웨덴과 독일영화계에서 활동했어요.
유럽 영화계에서 활동하던 버그만의 배우 생활은 1936년에 출연한 <간주곡>으로 새 길이 열리게 되었는데 할리우드 영화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이 <간주곡>을 보고 버그만을 눈여겨보아 미국으로 초청한 거죠. 셀즈닉의 초청에 응한 버그만은 미국으로 건너와 레슬리 하워드와 함께 <간주곡>의 리메이크작 1939를 찍으며 할리우드에 데뷔해요. 하지만 유럽에서 건너온 여배우를 써주는 스튜디오는 없고, 버그만은 <지킬 박사와 하이드> 출연 외 변변한 출연작이 없는 상태였어요. 한편 이 영화를 찍을 때 상대역이었던 유부남 스펜서 트레이시와 관계를 가지기도 했다고 해요. 그러던 중 1942년 셀즈닉이 워너 브라더스에 버그만을 대여해주면서 출연하게 된 미스터리, 서스펜스, 로맨스 그리고 코미디가 합쳐진 <카사블랑카>로 일약 스타가 되고 이후 찍은 영화들 역시 호평을 받으며 할리우드 최고의 여배우들 중 한 명이 되었어요.
스크린의 전설 잉그리드 버그만은 특히 <카사블랑카>, <가스등>, <오명>에서 고통받고 연약한 여성들을 연기한 배우로 잘 알려져 있어요. 그러나 1949년 실생활에서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과의 외도가 공개되면서 국제적인 스캔들이 되었고, 할리우드에서 7년 동안 쫓겨나는 신세로 전락하기도 했어요.
버그만은 스웨덴과 독일에서 영화배우로 활동하다가 할리우드 제작자인 데이비드 셀즈닉이 <인터매조>에 출연한 그녀를 발굴하면서 미국으로 건너왔어요. 그녀는 영화 <카사블랑카> 전에 4편의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했어요. 버그만은 남편인 폴 헨레이드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 험프리 보가트 사이에서 삼각관계에 놓인 일리자 런드를 연기했어요.
2년 후 그녀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영화화한 작품에서 선보인 연기로 처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어요. 이 시기 앨프리드 히치콕과 여러 영화를 찍었으며, 1944년 그녀는 범죄자 남편인 샤를 부아예에 의해 서서히 미쳐가는 여자를 연기한 <가스등>으로 최초의 오스카상을 거머 줬어요. 버그만은 평단의 호평과 흥행을 이룬 <망각의 여로>와 <성 매리 성당의 종>에 출연한 후,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오명>에 출연했어요. 이 영화에서 그녀는 다시 삼각관계에 빠진 여자를 연기했는데 머지않아 실생활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되었죠.
1949년 로셀리니 감독과의 외도가 공개되었을 때 그녀와 이 유명한 이탈리아 감독은 각자 결혼을 하고 자녀가 있는 상태였어요. 1950년 그녀는 로셀리니 감독과 영화 <스트롬볼리>에서 함께 일한 후 그와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낳았어요. 스캔들은 엄청난 충격을 주었어요. 파문은 심지어 버그만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미국 상원 의회에까지 도달할 정도로 미국에 파란을 일으켰어요. 당시에는 지금의 할리우드처럼 유명인의 스캔들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주지 않았으며 유명인의 싱글맘이나 혼외자녀는 지금이야 흔하디 흔하지만 당시에는 배우 경력을 위협했기에 로레타 영 같은 배우는 몰래 출산한 후 친딸을 입양하는 형태로 눈속임을 했었다고 해요. 버그만의 이미지가 너무 좋았던 것도 부정적으로 작용했다고 해요. 진 할로우 등 섹스 심벌 배우들의 스캔들과 달리, 성녀 잔다르크와 수녀처럼 청순하고 고결한 역할만 했던 국민 여배우의 타락이니 그 파장이 얼마나 컸겠어요.
버그만이 로셀리니 감독과 함께 한 <스트롬볼리>나 <이탈리아 여행> 같은 영화들은 소위 모더니즘 영화의 시초라고 불리며 재평가받고 있어요.
그의 남편인 페터 린드스트롬과 이혼한 후 이탈리아로 이주했고 1950년 로셀리니와 결혼했어요. 1957년 로셀리니와 이혼하기 전까지 버그만은 그와 함께 4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2명의 아이를 더 낳았어요. 첫 번째 남편 피터 린드스트롬과의 사이에서 딸 피아 린드스트롬을 두었고, 로베르토 로셀리니와의 사이에서 아들 로베르토 로셀리니, 쌍둥이 딸 잉그리드 이소타 로셀리니와 이사벨라 로셀리니를 두었다고 해요. 이사벨라 로렐리니는 엄마를 닮아 상당한 미녀로 모델 겸 여배우로 활동하였는데 특히 랑콤의 첫 전속모델로 1983년부터 1996년까지 활동했다고 해요. 이사벨라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아내이기도 했으며 영화 죽어야 사는 여자에서도 출연했다고 해요. 버그만의 손녀이자 이사벨라의 딸 엘레트라 로셀리니 역시 랑콤 모델로 활동했으며, 2016년 이사벨라 로셀리니를 랑콤에서 다시 모델로 기용해 화제가 되었다고 해요.
그녀는 남자 관계가 복잡했지만 자녀들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주었고, 아무리 바빠도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했던 어머니라고 해요. 다만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질 못하는 성격이어서 아이들과도 같이 살지는 못하고 항상 떠돌아다녔다고 해요,. 이런 버그만의 행동을 자녀들은 이해하면서도 어머니를 그리워했다고 해요. 버그만의 자녀들은 이부남매끼리 사이가 좋아서 그녀의 생전에도 사후에도 연락을 하고 만나는 사이라고 해요.
로셀리니가 촬영으로 인도에 간 사이 할리우드의 제안을 받아 1956년 그녀는 <아나스타샤>로 할리우드에 6년 만에 의기양양하게 돌아왔고 다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어요. 1957년 로셀리니와 이혼했고, 로셀리니는 이혼 직후인 1959년 <로베레의 장군>으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최고 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하고 말년에는 영화와 TV 연출을 병행했어요.
잉그리드 버그만은 1958년 파리에서 활동하는 스웨덴인 연극 연출가 라스 슈미트와 세 번째 결혼을 하면서 로마에서 파리로 거쳐를 옮기고 프랑스에서 활동했어요. 이때부터 연극에 많이 출연하였으며 전 세계 순회공연을 하여 토니상 등을 수상했어요. 세 번째 남편과는 1975년 이혼하였고 이혼 후에는 런던으로 다시 거쳐를 옮겼어요.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유명세를 되찾았죠. 1978년에는 마지막 영화출연작인 잉마르 베리만의 <가을 소나타>에서 명연을 펼쳐 아카데미 후보에 올랐어요.
할리우드에서 추방되었을때도, 복귀하여 할리우드에 돌아왔을 때도 변함없이 우정을 지켜준 것은 배우 케리 그랜트 단 한 사람이었다고 해요. 버그만은 평생 함께 연기한 모든 남자 배우들 중에 그랜트를 가장 존경했다고 해요.
그녀는 67세 생일이던 1982년 8월 29일에 친구들과 파티를 개최한 후 암으로 사망했어요. 유작은 텔레비전 영화였던 <골다는 여인> 골다 메이어에 대해 그린 영화였고, 그녀가 맡은 배역은 당연히 골다 메이어 역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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