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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페미니스트의 아이콘 캐서린 헵번

by 츠키아카리 2022. 12. 16.

페미니즘은 여성의 특질을 갖추고 있는 것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페미나(femina)에서 파생한 말로써 성차별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시각 때문에 여성이 억압받는 현실에 저항하는 여성 해방 이데올로기를 말하죠.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즘을 따르거나 주장하는 사람을 말해요. 

1907년 5월 12일 코네티컷주 하트퍼드에서 6명의 자녀 중에 두 번째로 태어났어요. 어머니는 코네티컷 주의 여성 운동가였던 캐서린 마 휴튼이었으며, 아버지는 하트퍼드 병원에서 비뇨기과 전문의사로 근무하던 의사인 토머스 노발 헵번이었어요. 캐서린 헵번의 부모는 자식들이 자유에 관한 주장을 하거나 토론을 하도록 키웠으며 진보적인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았는데, 이러한 시선은 뒷날 헵번이 부모와 또 같은 시선을 사회를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던 거 같아요. 캐서린 헵번은 페미니스트의 아이콘으로, 독립 정신, 활동성, 지성을 겸비했으며 당시 전형적인 할리우드 신인 여배우들과 반대되는 연기를 하면서 영화계의 영부인이 되었어요. 그녀는 6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영화배우로 활동하며 배우로선 기록적이 수치인 4번의 아카데미상을 수여했고, 12번의 후보에 올랐어요.그녀의 수상 기록을 넘은 인물은 아직 없으며, 노미네이트 기록을 넘은 인물은 21회 노미네이트 된 메릴 스트립 밖에 없어요.캐서린 헵번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4회 수상자로 유명하지만 단 한번도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는 것으로 더 유명하다고 해요.

헵번은 할리우드 에이전트인 릴랜드 헤이워드의 스카우트가 <전사의 남편>에서 헵번을 발견했는데요. 헤이워드는 헵번이 RKO 라디오 픽처스 제작 예정작인 A Bill of Divorcement <이혼 증서>의 시드니 페어필드 역으로 스크린 테스트를 받게 했다고 해요. 이 영화를 촬영하면서 연극과 다른 영화 연기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영화 산업에 빠져들었어요. 1932년 09월 30일에 개봉한 최루성 신파극 A Bill of Divorcement <이혼 증서>는 흥행에 성공했고 헵번은 연기에 호평을 받았죠. 그녀는 영화계에 데뷔하자마자 스타가 되었어요, 1년 만에 Motning Gloty <아침의 영광>에서 에바 러브레이스 역 연기로 1934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최다 수상 기록을 시작해요. 또한 933년 대성공을 거둔 영화 중 하나인 <작은 아씨들>에서 주인공 조세핀 마치 역을 연기해 1934년 제2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죠. 햅번도 조세핀 마치 역을 가장 좋아하고 자랑스러운 연기 중 하나라고 여겼으며 조세핀 마치의 성격이 털털하고 활달하다는 설정인데 헵번과 닮은 면도 있었다고 해요. 이렇게 1933년에 개봉한 두 영화가 모두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성공하면서 헵번은 할리우드와 RKO의 대표적인 스타로 자리매김하죠.

 

헵번의 첫 번째 주요 상대 배우는 캐리 그랜트였어요. 그들은 등장인물들이 바보스럽고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는 영화인 스쿠르 볼 코미디로 간주되는 하워드 호크스 감독의 <아이 양육>에 함께 출연했어요. 그러나 이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고, 그해 <포토 플레이>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그녀는 박스오피스의 독으로 꼽혔다고 해요.

헵번은 1939년 할리우드를 떠나 브로드웨이에서 로맨틱 코미디 The Philadelphia Story <필라델피아 스토리>에 출연했는데, 이 작품이 큰 히트를 쳤어요. 헵번의 당시 연인이었던 하워드 휴즈는 이 연극으로 헵번이 다시 스타덤에 오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해 초연 전에 이미 영화 판권을 헵번에게 사줬다고 해요. 연극의 성공 이후 헵번은 당대 할리우드 최고의 스튜디오인 MGM에 판권을 팔면서 자신을 주연으로 쓸 것과 조지 큐커, 두 남자 주연은 케리 그랜트와 제임스 스튜어트를 기용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고 해요. 1940년 이 연극을 영화화했고 1940년에 개봉한 영화들 중에 가장 성공한 작품들 중 하나로 남게 되었으며 이는 그녀의 연기 활동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어 줬어요. 또한 이 영화로 1941년 세 번째로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가 되었어요. 한편 연극 The Philadelphia Story <필라델피아 스토리>는 장기 공연되었는데, 1940년 3월에 뉴욕 초연이 끝나고 1940년 10월부터 1941년까지 워싱턴 D.C와 시카고 등에 순회공연을 다녔어요.

헵번은 이후 1940년대에 MGM과 스타 계약을 체결했고, 계속 왕성하게 주연급으로 할리우드에서 활동하게 되죠. 1942년 10월엔 브로드웨이로 잠시 돌아와, 다시 헵번을 염두에 두고 쓴 필립 배리의 연극 Without Love에 주연으로 출연해 16주 동안 매진되는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도 했어요.

1940년대에 환상의 짝꿍과 계속 만나게 되는데 바로 스펜서 트레이시예요. 1941년 헵번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 Woman of the Year <여성의 해>의 각본에 직접 관여하고 다시 감독 및 주연 선택권을 가졌는데, 남자 주인공으로 스펜서 트레이시를 추천한 것이었죠. 다시 헵번의 선택대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1942년 2월에 개봉해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헵번 개인으로서 네 번째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가 되었어요. 그들 이후 8편의 작품에 더 출연했고, 첫 영화 이후 실제 연인 관계를 맺는데요. 하지만 트레이시가 유부남이었기에 불륜관계였는데, 트레이시가 이혼을 완강하게 거부해 헵번은 평생 트레이시와 결혼하지 못했어요. 트레이시는 알코올 중독과 불면증에 시달리고 자주 우울했는데, 헵번은 그가 편안해지도록 곁에서 헌신하느라 1943년 Without Love 폐막 이후 1950년에야 다시 연극 무대에 나올 정도로 일이 줄어들었다고 해요.

 

1950년대 어느덧 40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그녀는 1950년 As You Like It <당신 뜻대로>에서 로잘린드 역을 맡았어요. 1952년 여름엔 버나드 쇼의 The Millionairess를 런던의 웨스트엔드에 위치한 New Theatre에서 10주간 연기했고요. 연기에 대한 평가는 갈렸지만 인기는 확실히 있어 브로드웨이로 진출해 다시 10주간 공연했죠.

 

그 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할리우드 아이콘인 험프로 보가트와 함께 존 휴스턴이 연출한 The African Queen <아프리카의 여왕>에 고지식한 독신 선교사 역으로 나와 험프리 보가트와 연기 대결을 했는데, 이는 헵번과 보가트 모두 처음으로 출연한 첫 컬러 영화였어요. 이 영화는 주로 벨기에 콩고 로케이션에서 촬영되었으며 감독은 전 영부인인 엘리너 루스벨트를 모델로 삼을 것을 주문했고, 1951년 말에 개봉된 The African Queen <아프리카의 여왕>은 은 성공적이었죠. 대중의 지지와 비평가의 찬사를 받았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다섯 번째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으며, 험프리 보가트는 그의 유일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어요. 당시엔 트레이시가 헵번보다 인기가 있다고 여겨지고 있었는데 10년 전 찍은 The Philadelphia Story <필라델피아 스토리> 이후 트레이시 없이 만든 이 첫 번째 성공적 영화를 통해서 단독으로도 흥행이 가능함을 증명하며 인기를 재확립했어요. 이 영화를 시작으로 1950년대에 자주 해외로 나가 작업하며 다양한 연기의 기회로 삼았죠.

 

MGM과의 계약에 따른 마지막 작품은 스포츠 코미디 영화 1952년 Pat and Mike <펫과 마이크>로 스펜서 트레이시와 다시 호흡을 맞췄어요. 여성운동선수와 수상한 스포츠 기획사를 다룬 이 영화는 헵번의 뛰어난 운동신경과 활동성이 돋보이는 작품이었죠. 커플의 주연 영화 중 호평을 받은 작품 중 하나이며 헵번 역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라고 해요. 이 작품으로 1953년 처음으로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 후보(뮤지컬/코미디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어요. 1955년에 데이비드 린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Summertime <여로>에서 다시 한번 깐깐한 독신여성을 연기했는데 여기서는 사랑 찾기에 성공하죠. 이 영화를 찍다가 본인의 잘못으로 수로에 떨어지는 바람에 만성 안감 염증에 걸렸지만 그게 헵번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되지 못했다고 해요. 1962년 유진 오닐 희곡의 원작인 <밤으로의 긴 여로>, 1965년엔 연극 <헛소동> 투어에 투신했고, 1967년엔 스펜서 트레이시의 마지막 작품인 Guess Who's Coming to Dinner <초대받지 않은 손님>에 나왔고 연이어 오스카상을 수상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영화가 완성된 직후에 사망한 트레이시의 추모작으로 여기고 있어요. 그녀는 1년 후 <겨울의 라이언>으로 오스카상을 수상했고, 헨리 폰다와 그의 딸 제인 폰다가 출연하는 <황금 연못>으로 유래 없는 4번째 오스카상을 수상했죠. 헵번의 마지막 영화는 그녀가 96세의 나이로 코네티컷 자택에서 사망하기 9년 전인 1994년 개봉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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