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찰리 채플린 이야기를 할 때도 나왔던 무성영화.
무성영화는 사일런트영화라고도 해요.
1895년 프랑스 파리에서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시네마토그래프가 공개된 것을 영화의 시발점이라고 보고
1927년까지의 영화는 무성으로 만들어졌다고 해요.
1920년대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시니어와 메리 픽포드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무성 영화배우들이기에
그들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해요.
픽포드는 청순하고 감성적인 여주인공으로 사랑을 받았고,
페어뱅크스는 가벼운 코미디극 배우로 시작한 후 무성 시대의
탁월한 모험가가 되었다고 해요.
오늘날 그들의 영화는 그들의 페르소나가 대표하는 것만큼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들은 최초의 할리우드 왕족의 표본이죠.
1920년 3년간의 교제 끝에 결혼하면서 미국의 국민 애인과 잘생기고
탄탄한 몸매의 박스오피스 스타 커플이 탄생하게 되었어요.
남편보다 10살이나 어렸던 메리 픽포드는 캐나다 출신으로 1909년
영화에 데뷔를 했고, 1909년부터 1912년까지 영화계를 이끌었던
D.W.그리피스 감독의 영화 75편에 출연을 했죠.
이 시기 그녀는 금발의 나선형 곱슬머리로 유행을 선도하기도 했으며
인기가 높아지면서 더욱 높은 출연료를 받는 데 적극적이었고
다른 스튜디오로 성공적으로 옮겼으며 <푸어 리틀 리치 걸>
<폴리애나>에서 청순한 역할을 연기했어요.
페어뱅크스는 1915년에 영화에 데뷔해 초반에는 중산층 역활로 등장했으며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쾌걸조로>, <삼총사> <로빈 후드>, <바그다드의 도적> 등
모험 시대극을 중심으로 코스튬 에픽영화에서 보다 남자다운 역할을 연기하기 시작했어요.
더글러스 페어뱅크스는 늘 웃음을 머금고 있는 무성 영화시대의 저돌적인 모험가였다고 해요.
1927년 그로맨스 차이니스 시어터 앞마당에 공식적으로 손자국을
남긴 최초의 배우인 페어뱅크스와 픽포드는 결혼하기 1년 전 1919년
찰리 채플린, D.W.그리피스와 함께 유나이티드아티스트라는
배급사를 공동 설립해서 배우와 감독들이 겪지 못한 새로운 수준의
자립성을 부여했죠, 메리 픽포드는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의 공동 설립자이자
4인 중 유일한 여성으로 1956년까지 이 회사의 파트너로 남아 있었어요.
픽포드는 자신의 첫 유성영화 <코켓>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긴 했지만
유성 영화배우로 성공적으로 변신하지 못한 무성영화 스타 중 한명으로 1933년 은퇴하기
전까지 겨우 네작품에만 출연했다고 해요.
둘이 함께 한 첫 유성영화는 <말괄량이 길들이기> 단 한편이라고 해요.
1933년 페어뱅크스와 픽포드는 별거에 들어갔고 1936년 이혼을 했어요.
페어뱅크스는 3년 후인 1939년 56세에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1976년 아카데미 평생공로상을 수상한 메리 픽포드는
1979년 87세로 뇌출형 합병증으로 사망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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