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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0세기 가장 사랑받은 미국 남자영화배우 제임스 스튜어트

by 츠키아카리 2022. 12. 21.

1908년에 태어난 제임스 스튜어트는 영국계 미국인 가족과 함께 관광과 문화생활을 열심히 했어요. 어린 시절 말수가 적고 기계설계도를 그리거나 화학 실험을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해요. 어릴 적 소원은 아프리카와 사파리에 가보는 것이었다고 해요. 간행물과 책을 좋아하고 보이스카우트에서 열심히 활동하기도 했죠. 기계, 공구상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사업차 출장으로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았으며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고 칼럼니스트 동생은 제임스가 유명해지기 전에 출연한 망한 연극 리뷰를 기고한 적이 있다고 해요. 제임스 스튜어트의 장래희망은 파일럿이었는데 미국해군사관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아이비리그에 전원 합격하고 대통령 아들이 다니던 머 서스버그 아카데미에 갔어요. 10대에 친구와 만든 광석 라디오를 팔고 경험 삼아 도로 작업과 마술사를 도우면서 고등학교 학비를 벌고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으며 14세에 이미 키가 191cm가 되면서 항공사나 의류 모델 제의를 받곤 했다고 해요.

 

제임스 스튜어트는 특히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이상적인 역할을 연기한 덕분에 20세기 가장 사랑받는 할리우드 황금기의 미국 영화배우이자 미합중국 공군의 장군으로 할리우드뿐만 아니라 미국 내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명이자, 현실에 존재했던 영웅으로 평가받는 인물이에요. 190cm가 넘는 큰 키와 긴 다리의 소유자인 제임스 스튜어트는 멀쑥한 스튜어트는 프린스턴대학교를 졸업한 우등생이자 노블레스 오블리주, 완벽주의자임에도 여유롭고 순탄했던 모범생, 비행 덕후, 흥행면에선 몰라도 작품성 면에선 기복이 없던 역대급 필모 등등 그야말로 완벽한 인생을 살며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받았다고 해요.

 

스튜어트는 프랭크 카프라 영화에 출연하고 스타가 되었는데요. 하나는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우리 집의 낙원>이었고, 다른 하나는 <스미스 씨 워싱턴 가다>였어요. 특히 두번째 영화로 스튜어트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뉴욕 비평가상을 받았어요. 프랭크 카프라는 비상식의 상식화를 재치 있게 풍자하여 아카데미에서 환영받는 감독이었어요. 비록 <스미스 씨 워싱턴 가다>로 아카데미를 수상하지 못했지만, 스튜어트는 캐서린 햅번, 캐리 그랜트와 함께 출연한 로맨틱 코미디 <필라델피아 스토리>로 유일하게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죠.

 

스튜어트의 영화 활동은 1941년 3월 미 육군 항공대에 징집되면서 잠시 중단되었는데요. 그는 2차 대전 중에 20건의 전투기 미션을 완수하면서 이등병에서 대령으로 진급했고, 결국 미 공군 예비군의 준장 지위까지 올랐어요.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최초로 실전에 지원한 할리우드 스타가 되었어요. 그 뒤 스튜어트 외에도 클라크 게이블을 비롯해 많은 스타가 참전했고, 전사한 사례도 있어요.

 

종전 후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되는 제임스 스튜어트는 약 80편의 영화 출연작 중 1/3은 참전하기 전까지 5년간 쉬는 날이 없을 정도로 다작 한 결과라고 해요 전쟁이 끝난 후 스튜어트가 출연한 첫 영화는 카프라의 <멋진 인생>으로 개봉 당시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크리스마스마다 TV에서 방영되는 전통을 남긴 작품이 되었어요. 그는 <멋진 인생>과 코미디 영화 <하비>, <살인의 해부>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어요.

<멋진 인생> 이후 스튜어트가 연기한 배역들은 점점 어둡고 더욱 성숙한 분위기를 띄었는데 특히 히치콕의 또다른 페르소나 그레이스 켈리와 함께 출연한 <이창>, 개봉한 지 50년이 넘게 지난 지금의 영화 평론가와 영화광들 히치콕의 대표작이기도 한 <현기증>등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스릴러와 <윈체스터 73>, <운명의 박차>등 앤서니만 감독의 서부영화에서 더욱더 그랬어요. 또한 스튜어트는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은 존 포드 감독의 서부영화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 존 웨인과 함께 출연하기도 했어요. 

 

<멋진 인생>은 낙관적이고 결말이 허무맹랑하지만 폭력을 강조하지 않아 스튜어트가 제일 좋아하는 출연작 중에 하나라고 해요 <멋진 인생>은 여름에 촬영했고 처음으로 인공눈을 사용했어요. 작은 아이디어를 구체화 했고 단조로워 보이지만 보기만 해도 마음이 흐뭇해지는 영화로 영화 평론가 로저 이버트는 늘 새롭게 감동할 수 있으며 기준을 제시한 시금석 같은 영화라고 격찬했어요. 개봉 당시에는 평범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저작권이 만료되고 TV로 방영되면서 인기를 얻어 대표적인 크리스마스 클래식이 되었죠. 스튜어트에게 이 영화는 각별하여 모스크바 국립대학과 협력하여 러시아어 번역본을 만들기도 했다고 해요. 

 

영화 산업이 첨단이었던 1930~1940년대 할리우드는 독자적인 작가색과 개성은 부족하지만 완성도 높은 영화를 단기간에 완성하는 꿈의 공장이 되어 많은 명작을 남긴 황금기였죠.  특히 제임스 스튜어트는 좋은 영화를 성실하게 제작하던 대형 스튜디오의 방식을 좋아했고 고정수입이 있는 배우였어요. 그러다가 할리우드에서 처음으로 러닝개런티를 받은 배우가 되었죠. 이는 스태프들이 출연료 외에 흥행결과에 따라 개런티를 받는 방식으로 고가의 배우나 감독의 개런티를 줄여 제작비가 지나치게 상승하는 것을 방지하고 계약 당사자로 하여금 최선을 다해 영화의 완성도에 집중하게 할 수 있어요. 할리우드 배우로서는 거의 최초로 독립영화에 출연하여 흥행수입에 비례하는 출연료를 제안했고, 영화가 흥행하면서 1950년대 최고수입 스타대열에 들었어요.

 

1960년대에는 가족 영화에 많이 출연했고, 그 외에는 중국의 산악지대와 사막 등 터프한 로케이션을 선호했다고 해요. 그 중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 사막의 기적이라는 재난영화는 휴 로리 주연으로 2000년대에 리메이크되기도 했어요. 1962년에 가족 코미디 영화 <홉스 씨 휴가 가다>로 베를린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어요.

 

1970년대부터 노안이 가속화되고 건강상태도 악화되어 활동이 줄기 시작했어요. 사실상 이 시기 은퇴한거나 마찬가지였지만 활발한 사회활동으로 매스컴에 빈번하게 노출되었으며, 영화에는 단역이나 우정 출연을 했고, YV에 많이 출연했어요. 버라이어티 쇼나 코미디 쇼, 토크쇼, 연속극 등 여러 쇼에 출연했는데  TV에서도 출연료를 가장 많이 받을 수 있었다고 해요. 1985년 아카데미 평생공로상을 수상했으며 그로부터 12년 후 89세의 나이에 심장마비와 폐색전으로 사망했어요.

 

그의 출연작은 미국영화연구소가 선정한 미국 최고의 영화 100선에 여러편 선정되었어요. 그 작품들은 <멋진 인생>, <스미스 씨 워싱턴 가다>, <이창>, <필라델피아 스토리>, <현기증>이에요. 

 

많은 후배 배우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으며, 사후 20년도 더 지난 지금도 여전히 미국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클래식 할리우드 남자배우 중에 한 명이죠. 그는 앞으로도 만세불변할 미국 영화계의 전설로 평가받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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